나의 동네, 나의 집

@dayrizphotography

내가 유년기를 보낸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던 마천동의 한 연립주택이였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계셔서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항상 가게에 계셨고, 나와 두살 많은 오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애기에게 좋다고 하는 천기저귀를 빨아서 입히셨을 정도로 부지런하셨고, 나를 아끼셨다. 주말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총총거리며 남한산성을 등산하고, 산중턱에 계신 뻥튀기 할아버지에게 재롱을 떨고 뻥튀기를 한입 가득 얻어먹었다. 이미 유치가 자라 젖병을 땔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도 젖병과 쪽쪽이를 달고 다녀서 할아버지가 내가 까치발을 디뎌도 안닫는 신발장 한켠에 젖병을 두셔서 때를 쓴 기억도 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바쁘실 때에는 어린이 동화가 녹음되어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돌려 들었고, 또래의 친구들이랑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짖궂은 동네 언니가 할머니댁에 가끔 놀러왔는데 혹시나 그 언니가 집에 갈까봐 그 언니의 말 한마디면 타고 있던 자전거도, 한창 가지고 놀고 있던 장난감도 다 양보했다고 한다. 내가 유일하게 할머니 속상하게 했을 때가 그 때와 병원에 계신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때를 썼을 때라고 하셨다.

유년기의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었고, 아낌없이 사랑받으며 컸다. 할머니가 장아찌, 청국장, 감자나물, 칼국수 등 한식을 참 잘하셔서 나는 30살이 너머 외국 생활이 어언 2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한식이 제일 좋고, 무뚝뚝하시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면 무장해제 되셨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부모님이 가게 일로 바쁘셨을때 내게 따듯한 안식처가 되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어른의 시각으로 이 시기를 바라보면 가슴 한켠 애잔함이 느껴진다. 조부모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도 부모님이 채워 주실 수 있는 손길이 있었을 것 같아서.

유년기의 내 세상의 중심에는 동네 놀이터가 있었다. 부모님은 빵집을 하시느라 낮에 집을 비우셨기 때문에 오빠와 나는 학교를 마치면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현관 앞에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던져 놓고, 빵집에 전화해서 부모님께 “하교 신고”를 하였다. 그리고 각각 컴퓨터 학원과 피아노 학원에 가서 1시간씩 채우고 난 뒤, 놀이터로 달려가서 해가 질 때까지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고, 친구들과 술레잡기도 하고, 탈출도 하고, 하루 온종일 놀았다. 배가 출출해지면 친구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떡볶이집에 가서 500원짜리 컵 떡볶이랑 퍽퍽한 돈까스 꼬치도 시켜먹고, 짬이 나면 문방구 가서 내일 필요한 준비물도 샀다. 다친 아기 고양이나 비둘기가 (맙소사) 있으면 구해준다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씻기고, 먹이고, 책상 밑에 은신처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동네에 비슷한 사정의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외로움을 느낄새도 없이 하루 하루 즐겁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해가 지기 전에는 집에 돌아와야한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잊고 캄캄해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았다. 엄마는 일곱시쯤 저녁을 챙겨주러 집에 돌아오셨는데 내가 없어서 걱정하셨고 두살 위 오빠에게 놀이터로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하루종일 놀이터 흙을 뒤집어 쓰고 놀아 꾀제제해진 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들어올꺼면 밖에서 자라며 쫓아내셨다. 30분쯤 지났을까, 반성의 기미가 보이면 봐주려고 엄마가 문을 빼꼼하고 열어 보셨는데, 그때나 저때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는 밤하늘에 별을 세면서 노래를 지어 흥얼거리고 있었다. 더 반성해야한다고 생각하신 엄마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셨고, 장기전이 될 것을 안 오빠는 내가 혹시 추울까봐 엄마 몰래 이불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나서 5분 후에 베개를 꺼내주었다. 또 5분이 지났을 때는 본인이 나와서 나랑 같이 현관 앞에서 이불을 깔고 잤다. 가게를 마감한 뒤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사이좋게 문 밖에서 이불을 깔고 자고 있는 우리를 보고 기가막혀 웃으시고 집 안으로 안고 들어오시는 것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오빠도 나도 주구장창 밖에서 놀아서 빨래가 매일 산더미처럼 나왔는데 엄마는 빨래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이들이 건강한 증거라고 하시며 약속 안에서 노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도 혼내신 적이 없다. 좋던, 싫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안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방목형으로 컸다. 그래서 우리 동네 놀이터가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지금도 집 밖에서 아이들이 꺄르르 뛰며 노는 것을 보면 미소가 띄어진다. 지금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돌아보면 참 소중해질 일상을 보내고 있기에.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난지 몇년이 지나, 필라델피아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직장도 없이 무작정 이사왔을 때는 생활비를 아끼려고 친한 언니랑 방 하나를 나눠썼다. 우리가 고른 곳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방 세개, 화장실 하나인 100년 넘은 낡은 아파트였는데 쌩판 모르는 여자 4명이 화장실 하나를 나눠쓰려니까 아침마다 누가 먼저 화장실에 가는지 신경전이 벌어졌다. 면접만 주구장창 두어달을 보고, 아직 백수인 상태로 월세가 더 싼 외곽으로 이사갔다. 다리를 건너서 30분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기껏해야 짐가방 두개에 다 담기는 전재산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건너던 그 다리, 그 날의 달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에는 방 두개, 화장실 두개인 아파트였는데 방마다 같은 처지인 대학생들이 두세명 살았고 나는 거실 한켠에 암막 커튼을 치고 살았다. 저녁에는 올빼미 친구들이 거실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새벽에는 아침형 인간 친구들이 아침 만드는 소리가 커튼을 타고 ‘내 방’으로 들어와서 하루 하루가 곤욕이었다. 잠을 잘 못자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지고 갑각류 알레르기가 생겨서 응급실도 갔고, 피부와 성격이 안 좋아졌다. 마침내 취직에 성공해서 방 하나, 화장실 하나인 아파트를 친한 언니와 함께 나눠쓰게 되었고, 훨씬 쾌적했지만 오롯한 내 방을 가지고 싶었다. 조금 보태자면 요가매트를 깔고 양팔을 벌려서 빙그르 돌아도 되는 크기의 내 방을 가지고 싶었다.

나라도, 도시도, 직장도 옮기고, 두 손으로 세야 할 만큼의 이사를 하고 나서야 월세이지만 내 방도, 내 거실도, 내 주방도, 내 화장실도 생겼다. 그리고 작은 발코니도 생겼다. 문을 닫고 잠을 잘 수 있고, 아침에 나 혼자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주택가에 살지만, 우리 집에서 나와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매일 새로운 꽃을 공수 해와서 파는 꽃집과, 직접 콩을 볶아 고소한 라떼를 내려주는 커피숍과, 작지만 알찬 프로그램이 있는 요가원이 있다. 나의 동네, 나의 집, 그리고 나의 일상.

photo credit: @dayriz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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